신불기17년
불기2558년 갑오년 음력 9.16.
(2014.10.09.목) 큰스님 춘천 법문
- 영산불교대학 특별법문 -
VI-35, 250회
학사복을 입고 이렇게 500명이 앉아계시니까 법당이 꽉 차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특별법회의 법문 제목은 ‘나는 무엇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입니다. 오늘 법문 제목이 ‘나는 무엇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입니다.
여러분 대답하겠습니까? 대답할 수 있을까? 아시는 분? 이 질문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깊은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는 대답해야 됩니다.
이 정도는 알아야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너무도 유명한 대 철인(哲人)입니다. 그 분도 모를 것입니다. 아니 몰랐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하는 말은 했지만, 몰랐지요.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철인도, 여러 종교의 교주들도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문 제목으로 제대로 됐지요?
(신도: 예~)
저 세상을 믿지 않고,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고, 배움도 없는 사람들은 ‘아니, 이 몸뚱이가 나(我)이지요!’ 라고 말하겠지요? ‘이 몸뚱이 이 육신, 이것이 나이지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유물론자들은 또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 몸뚱이가 나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지요. 그 대답은 점수를 못 받습니다. 이 몸뚱이가 진짜 나가 아니기 때문에 점수를 못 받아요.
여러분 불교에서 이 몸뚱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몸뚱이 말고 나라고 하면 거기에다가 정신 혹은 마음을 플러스(plus)시킨 거예요. 보태준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 몸과 정신,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하지요? 이렇게 대답한 사람은 상당한 사람이에요. 그렇잖습니까?
이것을 오온(五蘊)이라고 합니다. 불교 교학상으로는 오온이라고 합니다. 몸뚱이는 색(色)이라고 하지요? 빛 색(色)자, 그러면 정신은? 수 • 상 • 행 • 식(受想行識)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오온이 인연 따라서 일시적으로 화합된 것을 나(我)라고 말해요.
그러면 색을 한번 보겠습니다. 요즘 과학에서는 원소를 109가지로 분류할 거예요. 지금 원소를 109가지 발견했을 거예요. 인공으로 109번째 원소를 만들었는데요, 옛날에는 지수화풍이라고 했어요. 인도철학에서도 지수화풍, 또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그랬습니다.
⁃ 수상행식의 수(受)는 뭐냐? 여러분이 대상을 딱 쳐다보면 눈으로 들어옵니다. 이미지가 눈으로 들어와요. 저기 산속에서 새가 우짖는 소리가 귀로 들어와요. 사람의 체취가 코로 들어와요. 그렇잖습니까? 육근(六根)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감정이 일어나요. ‘싫다. 좋다.’하는 감정이 생겨요.
그래서 수(受)는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느끼는 감정을 수라고 합니다. ‘받을 수’자. 육근으로 들어오는 감정, 고(苦)-괴로운 것, 락(樂)-즐거운 것, 저기 유명한 음악가가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면 어떻습니까? 고의 감정이 생깁니까?
락의 감정이 생깁니까? 락의 감정이 생기지요. 그리고 배우가 연극을 아주 잘하면 배꼽이 빠지도록 웃잖아요? 희(喜)의 감정이 생깁니다. 기쁩니다. 자식이 밖에 나가서 깡패들한테 많이 맞고 들어와요. 보니까 너무 많이 상처가 나고 그래요. 그래서 어머니는 근심을 합니다. 우(憂)가 생깁니다. 어쨌든 이러한 감정을 수라고 합니다.
⁃ 그 다음에 더 깊은 정신활동이 있어요. 상(想)이라고 해요. 수상행식에서 상, 상은 생각하는 거예요. 앞에서 아드님이 부상당해 왔으면 생각을 하지요? ‘어떤 놈이 때렸어? 그놈의 자식은 세상에 못된 놈이어!’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어요. 그것을 상(想)이라고 합니다. 또한 개념작용이라고 해요. 개념이라는 것을 아시죠?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어요. 개념작용을 상이라고 그래요.
⁃ 그다음 행(行)이라는 것은 의지활동이어요. 수상행식의 행, 이것은 아주 중요한 용어입니다. 행은 의지활동입니다.
⁃ 그다음 수상행식의 식(識)은 수상행(受想行)의 3가지 활동을 통일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판단이어요. 판단하는 것을 식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수상행식을 정신이라고 합니다.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색이라고 그래요. 색수상행식이라고 그래요. 이것을 오온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배웠지요? 오온이 바로 나(我)지요. 이렇게 대답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점수를 40점밖에 못 줘요. 엄밀하게 그건 틀린 답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 아니어요. 색수상행식, 이것을 나라고 그러는데, 이것을 나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점수를 못 줘요. 그러나 색수상행식까지 이야기하면 상당한 수준이지요. 40점은 준다고요. 이것을 나라고 합니다. 이것을 오온이라고 그래요.
자, 유물론자들은 나를 이 몸이라고 해요. 이 몸을 나라고 하지요. 그들은 물질을 근본으로 봅니다. 정신은 물질에 예속된 것으로 봐서 뇌(腦)의 산물로 봐버려요. 수상행식을 뇌의 산물로 봐버려요. 뇌가 죽어버리면 정신도 죽어버린다고 봐요.
그러니까 그 유물론자들은 지수화풍만 이야기해요. ‘지수화풍이 모이면 정신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해서 차르바카(carvaka, 유물론자)에서는 많은 논리를 세웠어요. 그래서 수상행식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뇌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기는 사람이 죽어버리면 끝이어요. 그렇잖습니까? 사람이 죽어버리면 끝이어요.
자, 여기까지는 이제 알았습니다. 알았는데, 여러분 교학에서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예요. ‘취할 취(取)’자를 오온의 사이에다가 넣어요. 그걸 공부하셨습니까? 아직 하지 않았습니까? 아! 아직 안했나 봅니다.
오온을 오취온이라고도 합니다. 취 자를 넣어줘요. ‘취할 취’자예요. 집착이라는 뜻이 있어요. 취자가 집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집적인 욕망, 정확한 뜻은 고집적인 욕망, 집착적인 탐애, 취 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들어가 더불어서 사람이 온갖 탐욕을 일으킨다고 말해요. ‘온갖 탐욕을 일으킨다.’ 이것을 오취온이라고 합니다. 이 오취온이 있어서 고통을 부른다고 합니다. 고(苦)를 부른다. 이 집착, 이놈이 들어가서 오취온이 되면 고를 부른다 그거예요.
집착이 왜 고를 부르느냐? 집착이 들어가게 되면 여러 가지 욕심이 생긴다고 했잖아요? 여러 가지 욕심이 발생하게 되면 업을 짓잖아요. 부정적인 업을 짓습니다. 그 업을 짓게 되면 고가 오잖아요. 고가 옵니다. 생로병사의 사고(四苦)가 오고,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해서 두자로 말하면 애리(愛離)라고 합니다.
애별리고가 오고 또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있어요. 증회(憎會)라고 합니다. 원증회고, 고를 만난다 그거예요. 그다음에 또 구부득고(求不得苦)입니다.
구하려고 해도 구해지지 않는 고통입니다. 팔고(八苦)중에서 지금 일곱 가지만 이야기했습니다. 취(取) 때문에 일곱 가지의 고통이 와요. 그렇잖습니까?
취가 들어가게 되면 온갖 욕심이 생겨서 온갖 부정적인 업을 지어서 사고팔고(四苦八苦)를 부른다 그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오온성고(五蘊盛苦)라고 합니다. 여덟 번째를 오온성고 혹은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가 구부득고이지요?
그 다음에 오온(오음)성고입니다. 이 몸뚱이를 갖게 되면 그래요. 몸뚱이는 앞에서 말씀했죠? 핵이 취(取)란 말입니다. 오취온이 되게 되면 온갖 고통을 불러요. 사고팔고, 또 101고(一百一苦)라고 합니다. 101가지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온갖 고통을 부른다. 그래서 오온성고라고 한다. 오온성고까지 합해서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자, 이 오온이, 오취온이 나(我)인가? 과연 나인가?
자, 취(取)라는 놈, 취라는 놈을 슬쩍 넣어서 오취온이라고 하는데 지금 기존 불교의 교학에서는 이 취의 주체를 몰라요. 이 취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해서 취가 오는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 취가 오지 않는 거예요.
지금 기존의 불교는 취까지 이야기하는데, 취의 전제가 되는 그놈을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수님은 무엇인지 다 알 거예요. 아시는 분? (...) 그렇지요. 그렇게 대답하면 이 질문이 싱거워져 버립니다.
자, ‘나는 무엇인가 • 나는 누구인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온이라고 하면 몸과 마음, 몸과 정신을 말한다. 오온은 정말 나(我)일까? 아니다!’ 기존 교학에서도 기존 불교에서도 ‘아니다!’라고 해요.
우리 영산불교에서도 ‘아! 아니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진정한 나는 뭐냐? 오온을 가아(假我)라고 해요. 진아(眞我)에 반해서 가아, 거짓 가(假) 나 아(我), 가아라고 해요. 이 오온은 거짓 나예요. 본체에 종속된 한시적인 생명체예요.
그렇지요? 본체에 종속된 한시적인 복사체예요. 이 오온은 복사체일 뿐이란 말이어요. 이제 대답은 거의 나와 버렸습니다. 안 그럽니까? 대답은 나왔지요. 이 몸과 마음, 오온은 유한한 나예요. 그렇잖습니까? 80년 100년밖에 못살지요. 그래서 유한한 나예요. 가짜 나예요. 그런데 이 나라고 하는 이놈은 진짜 나가 아닙니다. 왜? 왜 진짜 나가 아니냐?
이 몸뚱이를 봅시다. 세월 따라서 변하지요? 생물학자들이 보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고 해요. 그렇잖습니까? 세포가 생겨났다가 죽고 시시각각으로 변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세월 따라 변해요. 그렇잖습니까? 어렸을 때에는 꼬마였는데 5살 먹고 열 살 먹고 20살 먹고 80살 먹으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잖아요. 세월 따라서 변하지 않습니까?
진짜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무상합니다. 변해요. 이 몸뚱이는 무상한 거예요. 무상하다 그거예요. 무상하다. 그리고 기존 교학에서처럼 ‘현상계에서 나(我)라는 것은 없다.’ 그거예요. 우리 영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현상계에서 볼 때 나라는 것은 없어요. 양파껍질이어요. 전부 분석해보고 분석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죽지 않는 그 무엇은 없어요. 실체는 없더라 그거예요. 현상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것은 맞아요.
영원히 죽지 않는 나의 본체 없이는 이 가아(假我)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이해하겠습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본체, 나의 주인공인 영혼체가 엄마 뱃속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엄마 아빠 부부관계에서 영혼체가 들어와야 애기가 생깁니다. 그래야 수정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부가 50년 80년을 살아도 애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또 그놈이 나가버리면 어떤 줄 압니까? 이제 죽는 거예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기존 불교에서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가짜 나(我)라는 것은 기존 불교에서는 알았어요. 다 알아요. 유식(唯識)에서 다 알아요. 진짜 나가 있을 것 아닌가?
아, 있지. 그것은 무엇인가? 진아(眞我)라고 그래요. 진짜 나(我)다 그거예요. 진아를 찾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래요. 그렇잖습니까? 그건 맞아요. 진아를 찾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어요.
점수로 80점짜리이지. 70점 되지. 진아를 찾으면 붓다인가? (신도 : 아닙니다.) 아니지요? 우리 현지사에서는 진아를 찾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긍정은 하지요. 그러나 거기는 아라한이어요.
그렇지요? 진아는 변하지 않아야지요. 죽지 않아야지요. 죽지 않는 나(我), 그것은 영혼체이지요. 영혼체는 다겁생으로 내려오면서 업을 지으니까 업과 모든 탐진과 습이 영혼체에 꽉 끼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육도 윤회하는 비아(非我)는 되지만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아라한의 몸뚱이는 아니어요.
아라한이 되려면 비본질적인 것이 쫘~악 빠져버려야 됩니다. 거기가 아라한입니다. 비본질적이라는 것은 뭐냐? 본질이 아닌 것이어요. 본질이 아닌 것, 앞에서 업이라고 했지요? 업, 그리고 탐진치 번뇌, 그리고 악과 습의 탁한 기, 이런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어요.
이런 것이 쏴~악 빠져서 순수 영혼체가 드러난다면 이것이 진아(眞我)입니다. 진아를 찾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제 여기가 아라한이니까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려면 부처님의 가피와 신심으로 가야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됩니다. 우리 영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시겠지요?
이제 여러분하고 비교해서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자, 선불교(禪佛敎)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진아를 마음자리라고 합니다. 마음자리, 조금 어렵게 ‘자리’를 붙여 ‘마음자리’라고 그래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 현상계를 낳은 무엇이죠? 본체니까 ‘공(空)’을 말합니다. 공을 진아라고 봅니다. 여러분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아니오!’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쪽에서 상당히 깊이 간 거예요. 공을 나의 본래면목으로 보니까 상당히 갔지요. 그러나 100점 대답은 아니어요. 공이 진아일 수 있습니까? 거기는 공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합니다.
주(主) 자, 사람 인(人)자 하고, 거기는 공사(公私)가 엄연히 다르다할 때의 공(公) 자, 공평할 공, 어쨌든 사사롭다의 뜻이 아니고 공적(公的)으로 할 때의 공자입니다. 빌 공(空)이 아니어요.
주인공(主人公), 그리고 작위(爵位)에서 제일 높은 작위가 공작(公爵)이지요. 그 공(公) 자를 써줘요. 우주 본체를 가리켜서 주인공(主人公)이라고 해요. 알았습니까? 그래서 화두에도 ‘이놈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이런 것이 심화두인데 시심마(是甚麽)도 그거예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게 뭐꼬? 네가 말하고 웃고 하는 바로 그 근원자리 그놈이 뭐꼬?’ 이것을 시심마라고 합니다. 시심마 화두라든지, 부모미생전 화두라든지, 우리가 많은 부모를 거쳐 왔잖아요? 그래서 부모 이전, 부모를 통해서 거쳐 왔는데 그러기 전, 그 말입니다. ‘있다 없다를 초월한 그 자리’라는 말이어요.
상대가 끊어진 자리가 절대 아닙니까? 절대 그 자리. 그게 공(空)입니다. 이 공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아니다!’ 그럽니다. 그것은 잘못 안거예요. 큰일 날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나의 주인공이나 땡삐의 주인공이나 같아야 되겠네? 그렇잖습니까?
여러분 개개인의 얼굴이 다르고 운명이 다르잖습니까? 인격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고 귀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내 주인공이 있고 네 주인공이 있고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우주의 본체, 상대를 초월한 그 자리, 의식이전을 내 주인공이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말이 안 돼요. 틀린 말인지 맞는 말인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주를 낳은 자리인 공은 비인격입니다. 공은 비인격이어요. 그렇지요? 인격이라고 봐버린 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렇잖습니까? ‘I AM’이라고 하지요? 자존자를 인격으로 보지요? 힌두교도 나중에 인격으로 해석한다고요. 그런데 그건 아니어요.
그렇게 보면 많은 모순이 생겨요. 해석 못합니다. 이건 아니어요. 비인격인 거예요.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했다.’ 이건 아닌 거예요. 그 시간이 아니지만, 그것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내 주인공’ 그러면 ‘진짜 나는 누구냐?
진짜 나는 뭐냐?’ 사실 대답이 거의 나와 버렸습니다. 그렇지요? 내 영혼의 실체, 비본질적인 것이 전부 떨어져 나가버린 내 영혼의 실체입니다. 주인공(主人空),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공’자를 ‘빌 공(空)’자를 씁니다.
힌두교에서도 주인공이라고 할 때 ‘빌 공’자를 써요. 아트만을, ‘빌 공(空)’자라고 해요. 그 영혼의 실체, 본질적인 것이 뚝 떨어져 나가버린 영혼체, 내 영혼체가 주인공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我)입니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조계종의 선객들이요, 경계가 확~ 뒤집히면서 자기 마음의 본성 마음자리가 확~ 드러납니다. 공(空), 우주의 본성, 그것이 본성인데 마음자리와 본성은 같습니다. 확 드러나는 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성품을 봤다 그거예요.
성품이 드러났다는 것이지요. 자, 경계가 뒤집히면서 천지가 온통 주객(主客)이 없이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현상세계는 주(主)가 있고 객(客)이 있어요. 상대가 있다 그 말이어요. 주객이 있지요. 주객의 벽이 무너져버렸단 말이어요.
이 말 알아듣겠습니까? 주객의 벽이 무너져버렸단 말입니다. 그 본성자리가 그렇습니다. 절대예요. 그래서 봤다는 것은 사실 무엇을 의미하느냐?
자, 본성 그 자리를 본 것, 알아차린 주체가 있어서 그래요. 알아차린 것이 무엇이죠? 영혼체의 작용이어요. 그것이 인간의 뿌리이자 진짜 나(我)인데, 기존 불교에서는 알아차린다고 하면서도 영혼체의 기능과 작용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근원적인 내 영혼체의 실체, 그래서 형이상적 실체, 본체계의 영역에 있는 진짜 나 주인공을 아는 철인(哲人)도 종교도 학파도 일찍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我)라고 할 때의 나는 무슨 뜻이냐? 나라고 할 때의 나는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이 몸과 마음을 주재(主宰)하고 주관하는 내 주인공 영혼체가 있다.
둘째, 미래제가 다하도록 죽지 않는 내 주인공 영혼체가 있다.
셋째, 이 거짓몸뚱이 몸과 마음의 본체인 내 주인공 영혼체, 이것을 나(我)라고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러한 나는 없다고 하는 것이 기존 불교예요. 현상계에서만 볼 때는 아무리 봐도 그런 나는 없어요.
그러나 분명히 이 몸과 마음의 본체가 되고, 이것을 주관하고, 또 영원히 미래제가 다하도록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내 주인공 영혼체를 처음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곳이 우리 영산불교입니다. 여기는 연기(緣起) 이전입니다.
영혼체는 연기 이전인 거예요. 태어난 적이 없으니까 연기 이전이라고 그래요. 이 말 알아듣겠습니까?
그 다음, 인도불교가 망한 이유가 이 영혼체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무아(無我)라고 하는 그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아버렸단 말입니다. 여러분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영혼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다시 묻는 거예요. 영혼체가 없으면? 하루살이도 안 됩니다. 영혼체가 없으면 아예 사람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죠? 사람이 나와서 인류가 지은 각종 선악의 업이 우주만물을 창조한 것은 알지요?
그런데 영혼체가 없으면, 본체가 없으면 아예 우주만물은 없지요?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한 영혼체를 없다고 하니 말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지금까지의 불교가 그랬습니다.
공산당 유물론자들이 영혼은 없다고 주장해요. 유물론자들은 그렇습니다. 이 몸뚱이, 물질만 있다고 봅니다. 정신은 앞에서와 같이 몸뚱이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봐요, 정신을 뇌가 죽어버리면 함께 없어져버리는 종속물로 봤어요.
이정도 이야기했으면 ‘나는 무엇인가 •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여러분 아시겠지요? 얼굴을 보니까 몇몇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네요. (박수~)
어느 집을 찾아가든 주인양반을 부르잖습니까? 이 몸뚱이는 집이어요. 버스를 타면 버스를 끌고 가는 사람인 운전사를 보지요? 운전사가 없으면 버스가 굴러갑니까?
운전사가 없으면 안 되지요? 나(我)라고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몸뚱이인 물질과 정신을 합한 개념입니다. 나의 주인, 그러면 뭐라고 하지요? 영혼체입니다. 육근이 갖춰져 있어야 됩니다. 전번 법문할 때에도 윤회의 주체 자격을 이야기했지요?
윤회 주체의 자격, 부파불교에서 이야기한 여러 가지 심식류도 아니고 아뢰야식도 아니어요. 오온상속설 심상속 업력의 상속 등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아니어요. 그것은 윤회의 주체 자격이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은 영혼체인데, 조건 및 자격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지 않아야 됩니다. 태어나지 않고 그러면서 죽을 수가 없어야
됩니다.
▸업을 저장 보존하고 이숙(異熟)시킬 성숙시킬 공간적인 개념,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체(體)가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몸,체가 있어야 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구족하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조건입니다. 이 조건에서 볼 때 아뢰야식은 어떻습니까?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입니까? 아니어요.
왜 그러느냐하면, 마음·일심이라고 하는 진여(眞如)에 무명(無明)이 딱 들러붙은 그놈을 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여에 무명이 결합된 거예요.
시작이 있잖아요? 시작이 있으면 안 되어요. 창조론을 왜 부정하는지 압니까? 창조하게 되면 시작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작 이전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시작 이전이 없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이야기한 거예요. 무시무종이어요. 시작이 있다는 것은 과거가 없다는 말이어요. 과거 모든 것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시작이 있습니까?
과거가 없는데 시작이 되겠습니까? 아니어요.
여러분 둥근 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작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이 거짓 몸뚱이를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이것은 본체 • 주인공의 한시적인 복사체입니다. 80년 100년밖에 살지 못하는 한시적인 복사체예요. 주인공이 없으면 이 육신은 탄생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만나 정자 난자만 결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영혼체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은 아실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나(我)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이유는 세월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어요. 무상(無常), 또 현상계적으로 볼 때에는 확실히 무아예요. 실체가 없어요.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본체계의 영역에 영원히 죽지 않고 일찍이 태어나지도 않는 이 몸의 주인공인 영혼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몸뚱이는 내 것도 아닙니다. 내 것도 아니다. 왜냐? 왜 내 것도 아니라고 하는지 압니까? 내 것이면 어떻지요?
여러분 내 것이라고 하면?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내 것인 거예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 육신과 정신을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디까? ‘병이 오지 않아야 되는데, 저 친구는 무슨 간경화를 앓고 있는데 나도 간경화를 얻으면 큰일인데, 정신질환이 생기면 큰일인데, 중풍이 들면 큰일인데…’ 해도 어쩝니까?
요놈이 말을 듣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말을 안 듣지요.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또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아침 4시경에 일어나서 저녁 9시에 자고, 그리고 시간을 할애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 그 말은 분명히 맞아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렇게 됩디까? 안 되지요?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체 하지 않아야 되는데 됩디까? 어쨌든 이 몸뚱이나 정신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은 나(我)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거예요. 나도 아니어요. 비아(非我)라고 합니다.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그래서 진아라고 하면 상대를 벗어난 절대, 있다 없다를 초월한 절대, 의식이전, 천지미분전이란 말도 합니다. 천지미분전, 천지가 생겨나기 전이란 말입니다. ‘저 공(空), 자존자가 나의 진아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불교는 나의 진아라고 말하는데 ‘아니다.’ 그거예요.
한발 더 나아가 보니까 그 본성자리, 절대 공의 자리가 공부할 때 드러나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경계가 견성이어요. 드러나는데 그것을 인지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없으면 그것이 훤한지 캄캄한지 주객이 다 허물어져 버렸는지 어떻게 압니까? 모르지요?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어서 ‘아! 견성하면 주객이 다 무너져버리고 경계가 뒤집히고 훤~한 빛뿐이더라.’ 그것을 보니까, 그것을 느끼니까 느끼는 놈 보는 놈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의 불교는 보는 그놈을 간과(看過)하고 있다니까요. 지금까지의 불교에서는 나의 당체인 영혼체, 그놈을 긴과하고 있다니까요. 그렇게 알아두십시오.
기독교에 설교 잘하는 사람은 며칠도 한다고 그러데요. 불교에서도 정말 책을 어마아마하게 보고 두루 다 봐서 대장경을 앞뒤로 꿰고 한 사람을 세워놓으면 법문 잘 하지요. 그러나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이죠?’
하고 딱 들이대면 대답을 못 해요. 견성한 사람 같으면 공의 자리 마음자리를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자리를 인식하고 보는 느끼는 주체를 모른단 말이어요. 그 주체를 몰라요. 그래서 명 법문을 해야 공덕이 되지, 말만 잘하면 중생을 오도(誤導)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중생을 오도할 수 있는 거예요.
자, 이 몸, 오온은 진짜 나(我)가 아니예요. 그 이유는 이제 알겠지요? (신도 : 예~) 그럼 진짜 나는 뭐죠? 말하겠지요? (신도 :예~)
기존 불교에서는 진아를 찾는 것이 불교라고 하는데, 영산불교에서는 대답하겠지요. 그러니까 오늘 이 법문을 녹음하면 테이프를 여러 번 들어 보십시오. 여러 번 들어보면 됩니다.
전번에 스님이 이야기했지만 《아함경》을 설하실 적에는 게송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승불교 경전인 《법화경》이나 《화엄경》으로 가면 게송이 한없이 나오잖아요.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화엄경》을 보면 그래요.
사실은 게송을 읊어줘야 되는 거예요. 읊으려면 범성으로 노래같이 하고 어쩌고 하는데 그게 좀 그렇습니다. 이제 게송만 읊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법문한 것을 시적(詩的)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게(偈)라고도 하고 송(頌)이라고도 하여 합쳐서 게송(偈頌)이라고도 합니다.
○ 게송(偈頌)
나는 무엇이냐 ‧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사람들은 이 몸과 마음이 나(我)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답한 사람들의 생각이 과연 맞는 답일까?
우리가 어느 집을 방문할 때 그 집주인을 찾는다.
이 거짓 몸뚱이 몸과 마음 오온이라는 것은 집과도 같아서
나도 아니고 내 것 또한 아니다.
물질과 정신은 색수상행식의 인연이 가합되어서
시시로 변함에 무상하고 현상계의 나없음이 무아로다.
그럼 진아는 무엇일까?
기존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본체 ‧ 공(空)이
우리의 본래면목 진아일까?
공은 생각할 수 없고 행위할 수 없고
육근을 갖추지 못한 비인격이다.
진아일 수 없다.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럼 우리의 진아는 무엇일까?
나의 본체요 업을 짓는 주체요 윤회와 연기의 주체요
창조의 주체인 영혼체가 진짜 나인 것을
따라서 진아인 영혼체가 없으면
이 거짓 몸뚱이도 태어날 수 없고 우주만물도 태어날 수 없다.
일찍이 태어남도 없고 영원히 죽지도 않고
육근을 갖춘 인간영혼의 실체가 윤회주체의 자격이 있다.
연기이전이요 본체계의 영역에 있으면서
이 몸과 마음을 주관하는 주체가 우리의 영혼체,
이것을 몰라서 인도불교는 망했다.
무아를 주장하다가
탐진과 업장, 기와 습, 비본질적인 것들을 다 제거해서
드러난 순수한 나(我) 영혼체를 찾음이 아라한이다.
전지하고 만능자재하신 우주 주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공부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된다.
이것이 불교수행자의 목표이다.
▬ 덧붙임
나는 무엇이냐 ‧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사람들은 이 몸과 마음이 나(我)다고 대답한다.
그러지요? 이건 상당한 수준이지요. 몸과 마음까지 알았으니까. 그러나 저기 유물론자들은 이렇게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몸이라고 그래요. 마음은 몸에 종속된 종속물로 보니까요.
이렇게 답한 사람들의 생각이 과연 맞는 답일까?
우리가 어느 집을 방문할 때 그 집주인을 찾는다.
주인이 있어야지 집주인이 있지요? 이 몸뚱이도 주인이 있어야지요.
이 거짓 몸뚱이 몸과 마음 오온이라는 것은 집과도 같아서
나도 아니고 내 것 또한 아니다.
그렇지요? (신도 : 예~)
물질과 정신은 색수상행식의 인연이 가합되어서
시시로 변함에 무상하고 현상계의 나없음이 무아로다.
이 말은 맞아요.
그럼 진아는 무엇일까?
기존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본체 ‧ 공(空)이
우리의 본래면목 진아일까?
공(空)은 생각할 수 없고 행위할 수 없고
육근을 갖추지 못한 비인격이다.
진아일 수 없다.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렇지요?
그럼 우리의 진아는 무엇일까?
나의 본체요 업을 짓는 주체요 윤회와 연기의 주체요
창조의 주체인 영혼체가 진짜 나인 것을
아셨지요?
따라서 진아인 영혼체가 없으면
이 거짓 몸뚱이도 태어날 수 없고 우주만물도 태어날 수 없다.
진아인 영혼체가 대단히 중요하지요. 그래서 우리 영산불교에서
영혼체설을 내놓은 거예요.
신교설이어요. 이것은 정말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교설입니다.
그거 아십시오.
일찍이 태어남도 없고 영원히 죽지도 않고 육근을 갖춘 인간영혼의
실체가 윤회주체의 자격이 있다.
연기이전이요 본체계의 영역에 있으면서
이 몸과 마음을 주관하는 주체가 우리의 영혼체,
이것을 몰라서 인도불교는 망했다.
무아를 주장하다가
탐진과 업장, 기와 습, 비본질적인 것들을 다 제거해서
드러난 순수한 나 영혼체를 찾음이 아라한이다.
거기가 이제 아라한이어요.
전지하고 만능자재하신 우주 주(主)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공부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된다.
이것이 불교수행자의 목표이다.
이것이 영산불교입니다.
▬ 이것은 게송이 아닙니다.
매미가 허물을 벗으면 새매미가 되듯 사람도 죽으면 기억과 의식이 거짓 몸뚱이를 버리고 자기 영혼체로 옮겨간다.
지은 업을 따라 육도 중에 한 세계로 가서 난다.
보살과를 얻은 스님은 죽으면 부답명로해서 왕생극락한다. 32상으로 금빛 광명을 내는 황홀한 보살의 진짜 몸을 얻는다.
불과를 증한 붓다, 큰스님은 32상 80종호의 무량억종광 빛의 우주의 주 불신을 얻어서 대적정삼매를 자재하는 극락환희를 누린다. 미래제가 다하도록 부처가 된 진짜 자기.
오늘 설법은 이만합니다. 50분 되었어요? 2시 30분에 시작했지요? 여러분 오늘 일찍 오셔서 지신대재를 모시고 피곤하시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냐? 나는 누구이냐?’는 아주 상식적인 질문 같아도 스님이 그때 처음에 왜 이런 법문을 안 했는지 가만히 생각하고 있다가, 이다음에 우리 불교대학생들 졸업하는데 품격이 있는 제목으로 해드려야 되는데 ‘아! 이것을 해야 되겠네!’ 해서 오늘 법문 들려드리게 되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대단히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그렇지요? (신도 : 예~) 대단히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정도의 수준을 갖춘 논사들을, 교학의 수준을 갖춘 우리 현지사 신도 분들이 많이 나오도록 대학교를 만들었고, 또 상준에 이르렀고, 오늘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니까 확신이 가고, 내 법문에 아주 공감을 하고 혼연당히 자질이 있고 우수한 분들을 논사로 양성하려고 몹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몇몇 교수님들은 그런 수일체가 되는 그런 모습을 보니까 대단히 즐겁습니다.
몇 년 전에 조계종의 대표되는 어떤 선사가 법문한 것을 보니까 이 몸뚱이가, 이 정신이 나(我)가 아니라는 것은 말하더라고요. 그건 알지요. 그래서 ‘참 나는 무엇이냐?’ 해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앞의 법문에서 소개한 거예요.
절대의 그 자리를 본래면목의 자리로 봐요. 잘못 본 거예요. 이 거짓 몸뚱이, 나라고 하는 것, 나에 대한 집착을 많이많이 버리세요. 오늘 결론으로 권해 드리는 것입니다.
집착이 얼마나 강하던지 이 거짓 몸뚱이, 나에 대한 집착을 중생들은 도저히 뗄 수 없어요. 지금 대답은 ‘네! 네!’ 합니다. 여러분들 ‘네! 네!’ 대답해도 아드님이 저녁 12시가 넘어도 집에 안 들어오면 그 아들이 진짜 자기 아들인 줄 알고 가슴이 벌렁벌렁 한다고요. 그렇잖습니까? 그렇지요?
전부 일시 인연이 있어서 내 아들이 되어 왔어요. 그러나 아들의 본래의 자기는 영혼체지요?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야 해요.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사실은 이 몸에 종속되어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중생들은 탐 ‧ 진 ‧ 치 놀음이어요.
말은 그래도 탐 ‧ 진 ‧ 치에 빠져서 살잖아요. 그런데 행(行)을 하되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살아라.’ 그거지요. 여기에서 많은 유익한 말이 나옵니다. 오늘은 50분 이것으로 그치지만, 그렇잖습니까?
(신도 : 예~) 자, 오늘 이만하겠습니다. (박수~)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구원실성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고아일심귀명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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